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악바르 대제 (문단 편집) == 개요 == 악바르·아크바르 대제([[페르시아어]]: اکبر اعظم / Akbar-i-azam)[* 2018년 기준으로 교과서 표현은 대부분 '아크바르 대제'로 되어 있다. [[국립국어원]]의 규정 용례가 '[[https://stdict.korean.go.kr/search/searchView.do?word_no=222346&searchKeywordTo=3|아크바르]]'이기 때문이다. 그런데 [[국립국어원]]에서는 동일한 [[페르시아어]] 인명에 대해서는 "벨라야티, 알리 악바르", "나테크누리, 알리 악바르"로 규정 용례를 제시하고 있다. 쉽게 말해서 [[알라후 아크바르]]할 때 그 아크바르이다.]는 [[무굴 제국]]의 제3대 황제이다.[* 재위기간: [[1556년]] ~ [[1605년]]이다.] 군대와 제도 개편으로 제국의 힘을 키우고 관용적인 종교 정책을 펼쳐 이슬람 외에 다른 종교도 포용했으며, 지역 강국 정도였던 무굴 제국을 진정한 제국으로 끌어올린 명군이다. 재위기간에 있는 동안 세운 업적들을 보면 '[[대제]]'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다. 행정 개편을 통해 체계적인 정부 구조를 확립했고, 수많은 영토를 정복해 [[인도 반도|인도 아대륙]] 대부분을 아우르는 대제국을 설립했으며 종교의 자유를 보장함과 동시에 예술을 사랑해 수많은 예술인들을 지원하고 문화를 진흥시켰다. 그의 재위기 동안 무굴 제국은 경제나 영토나 모든 면에서 몇 배 이상 급성장을 이루었고 당대 세계에서도 손꼽힐 정도의 거대한 대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. 하지만 그가 [[힌두교]]도들이 원수처럼 생각하는 [[티무르]]의 후예였다는 점과 치토르 요새 점령시 행했던 무자비한 학살극 등으로 인해 [[인도인]]들 중에서도 그를 증오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다.[* [[중국]]에서 한족 민족주의자들이 [[청나라]]의 [[강희제]]를 바라보는 시선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.] 하지만 [[파키스탄]]에서는 일부 이슬람 극단주의자를 제외하면 하늘이 내린 [[성군]]으로 평가하고, [[펀자브]]의 [[시크교]]도들도 대제라고 부르며 존경한다.[* 후술할 종교의 관용 부분 참조] [[우즈베키스탄]]에서도 그가 티무르의 후예라는 점 때문에 높이 평가하는 이들이 존재한다. 또한 인도인들 역시 악바르가 후임자인 [[샤 자한]]이나 [[아우랑제브]]에 비하면 종교의 자유를 크게 중시했던 현군(賢君)이었기에 그렇게까지 평가가 나쁘지는 않고 좋게 평가하는 경우도 많다. 즉 인도, 파키스탄, 방글라데시 가릴 것 없이 범인도권에서 두루 존경받는 군주로 생각하면 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